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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그때 수녀원과 고아원을 밀어냈네"

    08-07

  • 공지

    말복을 향해가는 요즘 폭염이 기승을 떨고 있습니다.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기원 드리며 포철 생성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정성이 깃들어있는지 잠시 회상해 보고자 글 한 꼭지를 올립니다.



    [그때 수녀원과 고아원을 밀어냈네]



    1968년, 포항제철소가 들어설 자리에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수녀원(예수성심시녀회)과 고아원이 있었다. 포스코는 제철소 건설만이 국민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최선이라는 데 공감한 수녀원의 이해를 얻어 철거를 무사히 마치고 포항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하게 된다. 지금의 포항성모병원 근처(대잠동)에 이주의 터를 잡았던 그 수녀원은 이후 시설을 확장해 오늘에 이른다. 당시 수녀원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고아들을 보살폈던 젊은 수녀들도 어느덧 푸근한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 수녀 분들께 포항제철 건설이 시작되기 직전의 이야기를 들어본 것은 2006년이었다.


    2006년에 아흔 살이었던 김 벨라뎃다 수녀는 포스코의 젊은이와 만나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다 말고 문득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철이 나라를 위해서는 크게 좋은 일을 했지만 우리한테는 애를 많이 먹였지."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촌평(寸評)이 아니라 총평(總評) 같았다.


    1968년 5월 결정된 제철소 부지 232만7000여평에는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의 예수성심시녀회가 포함돼 있었다. 고아원, 양로원, 장애인의집, 수녀원, 수도원, 수련관, 성당.... 솔숲에 에워싸인 이 성스러운 시설에서는 신부 2명과 수녀 160명이 540명 넘는 고아·노인·장애인을 돌보고 있었다. 부지 18만평에 건평 4000평, 더구나 초가 마을에서 유일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그때 총원장이었던 김 수녀의 '짤막한 총평'을 그때 사무국장이었던 일흔 살의 박 마리요왕 수녀가 구체적 사실'로 풀어냈다.


    "나는 1956년에 송정동 수녀원으로 왔는데…. 제철소 부지로 선정됐다는 보도를 접하고 급히 대구 매일신문으로 올라가 신부님을 만나고, 다른 사람들도 만났지요.”


    박 수녀는 대구에서 위안을 얻고 돌아왔다. 제철소에는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기 때문에 국가에서 의욕을 앞세우지만 무산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들었던 것이다.


    “돌아와서는 우리 수녀원을 창설하신 남 신부님을 뵈러 갔지요. 이미 은퇴하시고 갈평에 계셨는데, 그분이 충격받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천주께서 더 좋게 해주려고 하는 모양인데 걱정할 것 있나?"라고 반문하셨어요.”


    포항제철소 정문에서 감포읍 기림사 방면으로 30여리 떨어진 갈평리, 이 산골로 물러난 남 루이델랑드 신부는 프랑스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그분이 영일만 송정동 모래벌판에서 '천주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첫 삽을 뜬 날은 1950년 3월 25일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6·25전쟁이 터지고, 그해 늦여름에 형산강까지 내려왔던 전쟁은 수많은 고아를 남 신부의 품에 맡긴 채 북으로 올라갔다.


    1967년 10월 4일, 김 총원장수녀는 식구들에게 편지를 쓴다.


    '어제 이곳에서 종합제철 기공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사가야함은 결정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걱정은 아직 좋은 부지를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수녀들은 공동방에 모여 기도를 하고 그룹을 나눠 논의도 했다. 700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나설 일이 마치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대전·부산·대구·경산·하양·경주·포항 등 여러 후보지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한 곳을 찍기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막막한 어느 날이었다. 운전기사 이상원 씨가 "효자 쪽은 어떨까요?"라는 의견을 냈다. 김 수녀와 박 수녀는 귀가 솔깃해졌다. 무엇보다 형산강만 건너면 되니 이사하기가 쉬울 것이었다. 3만5000평쯤 되는 입지도 괜찮아 보였다. 문제는 지주가 70명이란 점이었다. 하지만 그의 친구인 신욱현 씨가 지주들을 설득해 줬다. 거기가 현재 위치한 포항시 대잠동 601번지이다. 수녀들은 두 사람을 '성 요셉이 보낸 사자'라고 생각했다.


    “송정동 수녀원 18만평 중에 67%가 솔숲이었어요. 남 신부님이 앞장서서 해송을 한 그루 한그루씩 심어 나가 마침내 울창하게 가꾼 겁니다. 소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때마다 반드시 모래구덩이에 찰흙 한 삽씩을 넣었고, 겨울에는 우리가 일일이 가지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솔숲이 임야로 분류됐어요. 임야는 보상가격이 제일 낮았는데, 우리는 경상북도, 그러니까 정부로부터 평당 50원을 받았어요.”


    수녀들은 '평당 50원'이 터무니없어 보였다. 그래서 창설자 남 루이벨랑드 신부의 뒤를 이은 프랑스 출신 길 수다니 신부는 '이주문제'로 찾아온 포스코 사람들을 몇 번이나 쌀쌀맞게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국가대업'을 위해 정든 터전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보상비는 부지에 대해 2200만원, 은행들의 감정을 거친 건물에 대해 1억500만 원.


    수녀원은 예산 걱정을 앞세운 채 1968년 3월 대잠동 부지의 토목공사를 시작하고, 그해 11월부터 이주에 들어갔다. 해를 넘겨야 할 이주, 다시 문제는 엄청난 이주비용이었다. 길 신부와 박 수녀는 청와대로 찾아갔다. 2200만 원이 더 필요하다는 하소연을 경청해준 이는 육영수 여사였다. 박 수녀는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어느 순간의 전화 한 통화를 생생히 기억한다.


    "육 여사님을 뵙고 내려온 뒤였는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전화로 이사비용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셨어요. 그날 청와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는데, 대통령께서 먼저 말을 꺼내 포항 수녀원 문제는 해결해 드리겠다고 하시더랍니다."


    추가로 2200만 원이 더 나왔다. 부지보상비와 맞먹는 큰돈이었다. 어쩌면 거기에는 통치자의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담겼을 것이었다. 가난한 나라가 챙기지 못한 '고아들과 무의탁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수녀원이 대신 돌봐 왔으니….


    길 신부와 박 수녀는 몰랐지만, 그 큰돈이 추가로 나오는 과정에는 김학렬 부총리와 박태준 사장이 다음과 같은 대화도 나눠야 했다.


    "수녀원에 이사비용 명목으로 2200만 원을 더 지급해 주시오.”


    "좋은 결정입니다. 저도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포철의 예산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년 예산에 그만큼 더 얹어드릴 테니, 집행을 미리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이주를 시작한 수녀원의 또 다른 걱정거리는 '어린 고아들'이었다. 고아 460명 중 4세에서 6세까지가 절반이 넘는데, 평소와 달리 돌봐줄 손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다치기 쉬운 아이들'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할 것인가? 1963년 송정동 수녀원으로 들어와 그때 사무담당이었던 최 안칠라 수녀(74) 기억의 한 갈피를 펼쳤다.


    "총원장 수녀님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간호사 출신으로 아이들에게 정말 자상하셨는데, 200명 넘는 아이들을 솔숲으로 데려가서는 '솔방울줍기 놀이'를 시키셨어요. 바닥은 모래밭이니까 넘어져도 다칠 리 없고, 또 고만한 아이들은 솔방울 줍기를 참 재미있어 하잖아요?"


    최후의 철거대상은 가장 늦게 지은 수녀원. 너무 견고하여 곡괭이는 먹히지도 않는 건물을 길 신부가 지휘하여 손수 다이너마이트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주하는 수녀들은 알뜰했다.


    “나무토막이든 블록이든 재활용이 가능한 모든 것을 차에 실었어요. 포항시내에는 '정말 지독하게 알뜰한 사람들'이란 소문이 퍼지기도 했지요."


    김 노렌조 수녀(63세)의 기억이다. 이사현장을 방문한 박준무 영일군수도 감탄했다.


    “너무 놀랐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한다면 다 잘살게 될 것입니다."


    이사가 가장 대대적으로 이뤄진 날은 1969년 1월 6일. 눈이 드문 포항에 그날따라 눈이 펑펑 쏟아졌다. 폭설이 무너진 수녀원의 쓸쓸한 폐허를 하얗게 덮었다.


    KISA로부터 버림받은 신생아 포스코가 급박하게 돌아갔던 1969년. 이한 해가 또 저물어 새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이제 그 터전엔 조국 근대화의 기둥 같은 거대한 쇳물의 설비들이 들어설 것이고, 드디어 수녀원의 품을 떠난 고아들이 '독립의 나이'에 닿는 미래에는 숱한 일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릴 것이었다. 그리고 더 먼 뒷날에 그들은 자녀의 손을 잡고 한번쯤은 추억의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털어놓을 것이었다.


    "그때 저 포철 부지에는 나를 키워 준 큰 수녀원이 있었는데..."



    * 이 글은 2006년 예수성심시녀회 원로 수녀들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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