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3
어느덧 선들바람이 불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낮에는 불볕더위여서 일교차가 어느 때보다 큰 요즘입니다.
포스코 창립 초기에 기술 분야를 총괄하시던 윤동석님을 기억합니다.
[최초의 가능성과 최대의 위기]
윤동석 1918년 생. 1968년 4월 포항제철 입사(창립요원), 부사장 때인 1970년 퇴사. 서울대학교 공대 금속학과 교수, 고려대 교수, 수원대 학장, 대한금속재료학회 회장 역임. 1993년 작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난국이니 위기니 하고 부르며, 때로는 총체적 위기설을 폭 넓게 강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때로는 문화적으로 각종 어처구니없는 사태들이 발생하여 국민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이나 기업, 또는 어느 조직체를 막론하고 그 성장과정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위기나 난국은 언제나 수반되는 것으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 주체의 발전 여부가 결정된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코 역시 총체적 위기를 극복한 예는 허다하다. 특히 초창기에는 그 강도와 빈도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한 사례로 대한국제제철차관단(약칭: KISA)과의 기본협정이 해지된 1969년 9월 2일부터 12월 3일 포항제철 건설자금 조달을 위한 한일간의 기본협약이 서명될 때까지의 일련의 사태를 들 수 있다.
▪최초의 가능성 - KISA의 발족으로부터 기본협정까지
경제기획원은 1966년 5월 9일 미국 코퍼스사에 대하여 국제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결정 통고하고, 여기에 서독, 일본 등의 업자가 포함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일본 철강업체가 참여하는 국제차관단의 구성은 야하타제철의 불참으로 일단 무산되었다.
반면 이에 대비하여 사전 접촉을 해온 영국과 이탈리아가 쉽게 호응해옴으로써 1966년 12월 6일 마침내 미국 피츠버그에서 우리나라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국제차관단 구성회의가 열렸다. 정부는 경제기획원 공공차관과장을 파견하여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계획을 설명하였다.
미국의 코퍼스사가 주축이 되어 블로녹스, 웨스팅하우스 등 3개사와 서독의 데마크, 지멘스 2개사, 그리고 이탈리아의 임피안티, 영국의 월맨 등 모두 4개국 7개사가 모여 4일 간의 회의 끝에 다음 사항에 합의함으로써 많은 진통과 우여곡절 끝에 대한국제제철차관단(Korea Internation SteelAssociates: KISA)이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합의되었다.
①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차관단이 1억 달러, 한국이 2억4500만 달러를 출자한다. ② 한국과의 협의는 주로 코퍼스사가 맡는다. ③ 서독 데마그 사는 영국·이탈리아까지 대표한다. ④ 일본의 야하타제철을 차관단에 가입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⑤ 차관단과 한국 정부가 합의한 장소에 1967년 4월까지 공장건설이 착공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⑥ 세계은행(IBRD) 및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와는 가급적 협조하되 직접적 관련은 맺지 않는다.
그러나 이 회의는 차관단 구성의 원칙과 출자 규모만 정하였고 투자의 시기, 그 내용과 절차 등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67년 4월 6일 경제기획원에서 정부를 대표한 경제기획원장관과 KISA를 대표한 포이(Foy) 코퍼스 회장 사이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위한 가협정이 조인되었는데 그 내용 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제철소 규모는 조강 100만톤으로 하되 제1단계는 50만톤으로 하고, 67년 7월 착공하여 70년 5월에 완공하며, 차관단이 제출한 계획서(사업 및 자금)에 대하여 향후 4개월 이내에 한국측이 수락여부를 결정하고 7월까지 정식계약을 맺는다. 한국 정부는 이 계획서를 검토할 국제기술용역단을 지명할 수 있으며, 소요 외화 1억2500만 달러를 미국·서독이 각 30%, 이탈리아·영국이 각 20%씩 조달하되 조건은 연리 6%, 3년 거치 12년 상환으로 하고 차관단이 교섭을 주선한다. 끝으로 제2단계에서도 차관단의 독점적 위치를 인정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1967년 7월 중에 기본협정을 체결하기로 하였으나, 예정이 빗나가자 정부는 KISA와의 실무교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기본협정을 조속히 타결짓기 위해 1967년 8월 7일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철강사절단을 미국에 보내게 되는데, 필자도 단원으로서 동행하게 되었다. 이 사절단은 20여 일 동안이나 KISA측과 회동하면서 협의를 계속하였으나, 시기상으로 회사가 창립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책임 있는 약속과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우리의 큰 고충이었다.
그러나 이 협의를 통하여 당초 연산능력 50만톤의 제철공장 규모를 60만톤으로 늘리는 반면, 소요외자를 1억900만 달러로 인하하는 교섭이 성립되었다. 이 협의에 의하여 그해 9월 25일에 KISA 대표 3명이 내한하여 상공부, 경제기획원 및 청와대에 종합제철사업에 관한 기본협약 초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1967년 9월 28일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실에서 종합제철 건설관계자(경제기획원 4명, 상공부 2명, 대한중석 3명, KISA 3명) 연석회의를 갖고 기본협정 체결을 위한 예비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들이 제기되었으나 10월 12일의 2차 회합에서 재론되어 총괄적인 합의를 보았다.
마침내 1967년 10월 20일 경제기획원에서 한국 정부를 대표한 박충훈 경제기획원장관과 KISA 대표 샌드배크 코퍼스 부사장 사이에 종합제철건설에 관한 기본규약을 체결함으로써 차관단 구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지 근 2년 반 만에 그 매듭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이 창립되었고, 그 후 KISA와의 접촉에서 일반기술계획서(GEP)를 11월 5일 확정하였으며, 12월 18일에는 추가협정을 체결하는 등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KISA와 계약한 기본협정은 계약시효만기인 1969년 9월 2일에 이르러 자동적으로 '해지' 되고 말았다. 그것은 협정 제8조 제5항에 확정재무계획서가 제출된 날로부터 200일 이내에 차관을 조달하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해지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는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국가들이 차관공여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만기일까지 아무런 회답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의 위기 극복 - 하와이 구상
KISA와의 계약상 해지는 1969년 9월 2일이지만 그 수개월 전부터 외자조달에 난항을 겪을 징조가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1968년 11월의 IBRD가 작성한 한국경제동향보고서, 1969년 4월의 우사드 코스탄조(Usaid Kostanjo) 처장의 'POSCO 사업의 확정재무계획에 대한 분석'은 대표적인 부정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를 예감한 박태준 사장은 그 대책에 노심초사하던 차에 1969년 2월 미국으로부터 귀국 도중 하와이에서 획기적인 착상을 해냈다. 후일 '하와이 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위기극복 착상은 대일청구권자금(유·무상)을 종합제철용 소요외자로 활용한다는 것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와이 구상을 주축으로 대일 설득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7300만 달러의 청구권자금을 포스코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역사적인 대역사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외자에 대한 시설재 차입과 병행하여 내자에 의한 도시, 토목, 용수, 항만, 철도, 도로 등의 건설공사가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포스코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어떠한 난국이 닥쳐와도 냉철한 통찰력으로 난국해소의 이념을 확립하여 차분히 노력한다면 새로운 단계를 여는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보「쇳물」199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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